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앨프리드 히치콕 (문단 편집) == 생애 == [[1899년]] [[8월 13일]] [[런던]] 출생. 부모는 양계와 과일 도매업을 하는 상인이었으며, [[가톨릭]] 신자였다. 후에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걸작 스릴러 영화들을 만든 감독답지 않게, 어렸을 때는 무척 겁 많고 소심했다고 한다. 그런 어린 시절을 겪었던 탓인지, 공포라는 것에 대해서 어느 누구보다 잘 알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릴 때 아빠의 심부름으로 [[경찰서]]에 갔는데, 아빠의 쪽지를 전해 받은 경찰이 무서운 표정으로 히치콕 감독을 감옥에 10분 정도 가두었다고 한다. 아빠의 장난은 그에게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았다. 실제로 그는 경찰 외에도 달걀과 자동차 운전을 무서워했다. 1913년 [[이냐시오 데 로욜라|성 이냐시오]] 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가을 런던 시의회가 설립한 항해학교에 입학했으나, 1914년 아버지가 숨져 전신회사에 기술자로 입사했다. 그의 그림 솜씨를 눈여겨본 동료의 소개로 런던 [[백화점]] 광고 회사로 자리를 옮겨 광고를 기획하고 사보에 삽화를 그리고 글을 썼다. [[런던대학교]] 골드스미스의 미술학과에 입학해 낮에는 회사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대학에서 미술을 배웠다. 미술 공부는 그에게 연극과 영화에 눈을 뜨게 해주어 틈날 때마다 영화관을 찾고 영화 관련 잡지를 탐독했다. 이때 그는 영화와 문학에 심취한다. 훗날 "미국 작가 [[에드거 앨런 포]] 작가의 작품을 읽은 것이, 공포영화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파일:external/www.latimes.com/63695814.jpg|width=300]] || || 젊은 시절 모습. || 처음 영화사에 들어간 히치콕 감독은 타이틀 작가, 미술감독 등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이 시기에 그는 앨마 레빌을 처음 만나 훗날 결혼한다. 1922년 시모어 힉스와 함께 단편영화 〈항상 부인에게 얘기하세요〉를 처음 공동 감독했고, 같은 해 〈13번〉이란 빈민층의 생활을 다룬 코미디 영화를 감독 및 제작했다. 후자는 실패했다. 이후 1925년 〈기쁨의 정원〉을 내놓으며 영화감독으로 정식 데뷔한다. 그는 1926년작 〈하숙인〉으로 평론과 흥행에서 모두 큰 성공을 거두며, 영국 영화계에서 주목 받는 영화감독이 된다. 이후 〈나는 비밀을 알고 있다〉, 〈[[39계단(1935년 영화)|39계단]]〉, 〈[[사보타주]]〉, 〈젊음과 순수〉, 〈사라진 여인〉 등 내놓는 작품마다 연속으로 흥행에 성공한다. 특히 1929년 발표했던 자신, 그리고 영국 영화사상 첫 유성 영화 〈[[협박(영화)|협박]]〉은 그가 서스펜스 장르의 대가로서 명성을 다지는 첫 시작이었다. 이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미국 영화)|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제작자인 데이비드 O. 셀즈닉이 그를 불러, 1940년 〈[[레베카(1940)|레베카]]〉로 할리우드에 데뷔한다. 덧붙이면 레베카는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이 됐다. 히치콕 감독은 할리우드와 영국을 오가며 수많은 스릴러 및 서스펜스 걸작들을 쏟아냈다. 〈의혹의 그림자〉, 〈[[오명(영화)|오명]]〉, 〈다이얼 M을 돌려라〉[* 그의 유일한 3D 영화이다. 21세기에 3D로 변환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에 3D로 찍은 작품이다. 놀라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지만, 영화보다 입체경이 약 60여 년 이전에 발명되었고, 무성 영화 시절에도 3D 영화는 있었다. 1950년대 초반이 3D가 본격적으로 광고에 적극 활용되던 시기였는데, 지금과 달리 눈의 피로가 워낙 심하고 2D와 별반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크게 대중화되진 못했다. 〈다이얼 M을 돌려라〉 역시 개봉 직후 금방 2D로 상영되었다.], 〈[[이창(영화)|이창]]〉, 〈나는 결백하다〉, 〈[[현기증(미국 영화)|현기증]]〉[* 이 영화는 2012년 [[영국 영화 협회]]가 발간하는 영화 전문지 《사이트 앤드 사운드》가 전 세계 846명의 영화평론가, 감독, 시나리오작가 등을 대상으로 실시한 역대 최고의 영화 조사에서, 1962년부터 2012년까지 50년 동안 1위 자리를 지켜왔던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을 누르고 1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등을 거쳐, 1960년 스릴러 영화의 영원한 걸작으로 꼽히는 〈[[사이코(영화)|사이코]]〉를 만든다. 〈사이코〉는 절묘한 촬영술과 완벽한 음악의 활용 등으로 불멸의 명성을 얻었다. 참고로 영화 속에 등장한 거금 4만 달러가 히치콕 감독이 여러 번 언급한 [[맥거핀]]의 대표적인 사례다. 그에게 불멸의 명성을 안겨 준 〈현기증〉,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사이코〉 이 세 작품은 1958년부터 60년까지 불과 1년 주기로 나왔다. 되돌아와서, 한편 1955년부터는 TV 프로그램 〈히치콕 극장〉에서 자신이 직접 사회를 맡으며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1956년에는 추리/미스터리 소설 잡지인 〈앨프리드 히치콕 미스터리 매거진〉을 내기도 했는데, 그는 잡지가 얼마 가지 않아 폐간될 것으로 생각했으나, 수준 높은 작가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지금까지 발간되고 있다고 한다. 한국어판은 1997년에 해난터라는 출판사에서 딱 2권 내고 접었다. [[파일:external/academiaparaninfo.files.wordpress.com/alfred-hitchcock-02.jpg]] 〈[[새(영화)|새]]〉 때까지 히치콕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지만, 이후 〈마니〉, 〈황옥〉, 〈찢어진 커튼〉 같은 영화들이 별 성과를 못 거두면서, 나이가 들어 한물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프렌지〉를 통해 재기에 성공하고, 1976년 77세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영화인 〈가족 음모〉를 만드는 노익장을 과시했다. [[1980년]], 그는 만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히치콕의 유해는 화장되어 [[태평양]] 바다에 뿌려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